근대(近代) 인물

이태직(李泰稙)

1878 - 1913

구한말(舊韓末)애국지사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능(大能), 호는 경산(耕山), 아버지는 시산(是山) 장수(章秀)이며, 어머니는 문소김씨(聞韶金氏)로 진만(鎭萬)의 딸임. 공은 일찍부터 성품이 강개(慷慨)하고 의를 중히 여기며 작은 일상사에는 사람들과 다툼이 없으나 대의에는 백절불굴(百折不屈)하는 기개가 있었다.
광무(光武) 을사년에 망국의 조약 체결 후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선생과 함께 항왜운동을 하다가 누차(屢次) 구치(拘置)되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서울의 뜻있는 동지들을 방문하려 했으나 그들의 철저한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동지 김동삼(金東三)과 중국에 망명을 하려 했으나 역시 일경(日警)의 감시와 누차의 구금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함에 타고난 성격에 사불여의(事不如意)하니 병석에 눕게 되었다. 모든 약을 전각(全却)하고 금성산(金城山) 하 소옥(小屋)에 이거하여 외인 내방(來訪)도 사절하다가 1913년(계축)에 36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치다.
그 후 고을 유림(儒林)들이 경산계(耕山契)를 조직하여 공의 유지를 이어오다가 1967년 기념 사업회를 발기하여 1971년에 공의 향리 산운리(山雲里) 입구에 기념비를 제막하였다.
훈장증 제2126호 (1990년12월21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됨. 이상은 《耕山 李泰稙 선생 小事와 永川李氏世譜》에서 引用하였음.

이관식(李觀植)

1883 - 1947

구한말(舊韓末)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무언(務彦), 호는 묵암(黙巖), 아버지는 처사 택락(宅洛)이며 어머니는 해주오씨(海州吳氏)로 이종(利宗)의 딸임. 공은 성행(性行) 순후(純厚)하고 남에게 자선(慈善)을 베풀었으므로 송덕비를 세웠다.
청주 한덕연(韓德練)이 비문을 찬하고 그 명(銘)에 말하기를 「'德을심은根本있어 事績을 기록하나니 스스로를 낮추고 義로서 利를 삼았고 信을講하고 和睦하게 다스렸다. 殘戶의 稅와 凶年의 租稅를 베풀어 窮民을 救恤하여 公私間에 성실하였으니 口傳을 碑石으로 세워 傳함을 두터이 함이 옳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義城郡佳音面 陽地里에 송덕비(頌德碑)가 있음.

이형(李瀅)

1886 - 1947

구한말(舊韓末)애국지사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무일(撫一), 호는 흥산(興山), 아버지는 처사(處士) 장수(章壽)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응환(應煥)의 딸임. 공은 독립운동가로 청송군 화목 장터에서 기미독립만세주도 2년 옥고 치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追敍) 받았고 대통령 하사금으로 의사 묘비를 세웠음.

이태학(李泰鶴)

1890 - 1962

구한말(舊韓末)애국지사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명구(䳟九), 호는 남고(南皐).아버지는 장두(章斗).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 광지(光枝)의 딸임. 公은기미(己未)삼일운동당시 대구성경학교(계성학교) 학생을 동원 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왜경에 피체 1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고 1935년 경북노인 회장이 되었으며 1992년3월1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追敍)받았으며, 1993년10월5일 공의 나라사랑과 참다운 목자로서 삶을 기리기 위하여 애국지사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 기념비를 세웠다. 이상은《永川李氏 世譜》에서 引用하였음.

이숙(李淑)

1898 - 1975

구한말(舊韓末)애국지사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우명(遇明), 호는 죽사(竹槎).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장섭(章燮)), 어머니는 숙부인 진보이씨(眞寶李氏)로 도정(都正) 만향(晩逈)의 딸임. 공(公)은 일찍 웅비의 뜻을 품고 서울 중앙고보에서 人村 金性洙·古下 宋鎭禹선생의 훈도를 받았다. 기미년 3·1 만세운동 때에는 학교 내에서 연락, 동원 등의 역할을 담당, 주도적인 활동을 했다. 그 후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적을 두었으나 조국광복의 뜻밖에는 없어 북경대학으로 유학하면서 북경, 상해 등으로 망명전전하면서 김원봉이 영도하는 의열단(義烈團)에 김지섭열사와 함께 입단하여 임정요원 심산 김창숙·석주 이상룡과 함께 조국광복운동에 침식을 잊다가 신병으로 귀국하였다.
신병을 치료하던 중 일제에서 해방되자 후세교육을 위하여 외국어 대학을 설립했으나 민족동란으로 계속할 수가 없었다. 해방 후는 이승만의 노선이 뜻에 맞지 않아 수차 등용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초야에서 일생을 마쳤다.유고(遺稿)가 남아 있어 1992년 죽사회고록이(竹槎回顧錄)이 간행되었다. 이상은《永川李氏 世譜》에서 引用하였음.

이용득(李龍得)

1923 - 1992

구한말(舊韓末)애국지사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천(永川). 아버지는 처사(處士)장복(章福)이며 어머니는 월성박씨(月城朴氏)로 봉기(鳳基)의 딸임. 공(公)은 1944년 갑신(甲申)에 왜정징병제에 의하여 강제입대, 같은 해 중국 호남성(湖南省) 형양지구(衡陽地區)에서 애국동지들과 일본군영(日本軍營)을 구사일생으로 탈출 중국 중앙군사 위원 별동대(別動隊)에 망명(亡命), 1945년 을유, 2월에 중경임시정부 광복군사령부 경위대(警衛隊)에서 활동 중 1946년 병술,6월 광복군 복원령(復員令)에 의하여 귀국하였다. 1990년 경오 8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敍勳)하다.
〈參考文獻〉 : 《뿌리(2000.6.1.일 발행》, 《영천이씨 淵源과 世系》, 《永川李氏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