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朝鮮朝) 인물
이려(李麗)
1384 - 1455
고려 말 조선초기의 은사(隱士).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성초(聖初), 호는 라은(羅隱). 아버지는 낭장(郞將) 흥룡(興龍)이며 어머니는 보승랑장(保勝郞將) 구순(仇純)의 딸임. 고려가 망하자 공은 군위현(軍威縣) 양곡(良谷,현 군위군 내량리)에 은거(隱居)하여 평생 동안 두문불출하고 구국(舊國)고려를 잊지 못하는 뜻으로 고려의 려(麗)를 따서 이름으로 하였다 한다. 이로 미루어 공이 나라에 대한 충성된 마음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우리 영천이씨가 군위 땅에 입향 한 것은 이때부터라고 추정된다.
《赤羅誌, 永川李氏 世譜》
이세헌(李世憲)
1476 - 1555
조선초기의 문인(文人).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전(士典), 호는 우암(牛巖). 아버지는 선산부(善山府)훈도로 통례원 좌통례로 증직된 종림(宗林)이며 어머니는 증 숙인군위박씨(贈淑人軍威朴氏)로 처사(處士) 종밀(從密)의 딸임.
1504년(연산, 갑자)에 진사시에 급제, 손(孫) 광준(光俊)이 귀히 되어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되었다.
공은 총예(聰睿)가 뛰어나고 문예가 숙성(夙成)하였으나 사림(士林)의 화를 예측하여 과거(科擧)를 단념하고 성현의 서적을 탐독(耽讀)하여 수기지도(修己之道)에만 전념하였다. 음애(陰厓) 이문의(李文懿)공이 공의 치군지도의 경서강론을 듣고 경복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여 현신(賢臣)을 등용하매 문의(文懿)공이 공을 추천(推薦)하여 크게 등용될 듯하였으나, 다시 사화(士禍)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니 아쉬운 일이었다.
공의 재학(才學)과 행의(行誼)로 보아 벼슬에 올랐더라면 반드시 현달(顯達)하였을 것을 폐주(廢主) 연산(燕山)의 방종(放縱)함을 보고 미리 피하여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 수차의 사화를 무사히 넘기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진실로 어진 선비라고 칭송하였다. 저서로는 우암집(牛巖集)이 있음. 《李象靖撰遺墟碑銘, 赤羅誌 嶺南人物考》 등에서 引用함.
이광준(李光俊)
1531 - 1609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준수(俊秀), 호는 학동(鶴洞).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여해(汝諧)이며, 어머니는 일선김씨(一善金氏)로 직장 형손(亨孫)의 딸임. 1562년(명종17,임술)에 문과별시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 경주와 안동의 교수성균관박사와 전적, 하동과 창녕현감, 형조좌랑, 정랑, 임천과 예천군수, 청송부사를 지냈다.
1591년(선조24, 신묘)에 성균관사성과 내자시정(內資寺正)을 거쳐 다음해 임진년에 강릉부사가 되었다. 보임 후, 수개월 만에 임진란발생으로 왜적이 강릉을 침범할 때, 두 아들(민성, 민환)의 조력으로 부민과 병사들을 지휘하여 왜적을 물리친 승전보가 조정에 알려져 특명으로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이듬해(1593) 중화(中和)가 왜적의 침공을 당하자 조정에서 공을 다시 중화부사로 삼았다. 공이 부임하니 관아는 잿더미가 되고 눈에 보이는 것은 빈터뿐인데 공이 손수 농기구를 잡고, 백성들을 독려하여, 둔전을 열고 축성과 군무에 정진하니 서도의 부성(富盛)한 고을이 되었다. 이어서 1599년에 장례원판결사를 역임한 후, 충주목사로 나갔다가, 1602년 형조참의, 선조36, 계묘년(1603)에 강원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갑진 년에 사임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선생은 본향의 장천서원(長川書院)이 병화로 소실된 것을, 충주목사 재임 중, 공의(公議)를 모아 빙산사(氷山寺) 옛터로 이건 중창하고, 회재 이언적(李彦迪)선생을 합향 하여 빙계(氷溪)로 개액(改額)하였다. 일찍이 이조전랑(吏曹銓郞)으로 있던 심의겸(沈義謙)과는 대과동방으로 요직에 천거하려 했으나, 후비(后妃)의 근척이라 사양하고 왕래조차 끊었으니 선생의 성품을 미루어 알지니라. 후일 사림(士林)에서 오양서원에 배향하였고, 2006년 6월에 정부지원으로 훼철(毁撤)된 빙계서원이 복설되자 사림의 공의로 빙계 5선생의 위판(位版) 함께 서원 숭덕사에 선생을 추배하였다. 유집으로 학동일고(鶴洞逸稿)가 있다.
《張旅軒撰墓誌·金應祖撰行狀·鄭宗魯撰神道碑銘·嶺南人物考》 등에서 인용함.
이민순(李民淳)
1567 - 1631
조선중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태고(太古), 호는 운암(雲巖). 아버지는 찰방(察訪) 광량(光良)이며 어머니는 숙인(淑人) 옥산장씨(玉山張氏)로 응익(應翼)의 딸임. 서애 류성룡 문하에서 수학, 학문을 터득한 뒤에 뛰어난 문장과 단정한 행실은 많은 선비와 벗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또한 지평(持平)이었던 홍위(洪瑋)와 도사(都事)였던 이종가(李宗可)와 함께 남계서원(南溪書院)을 창립하여 그 사실이 서원 창건 록에 나타나 있다. 공이 유학(儒學)에 종사하여 스스로를 키운 이후 여러 번 과거에 임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고향사람들이 그의 행의에 감복했다는 얘기가 적라지(赤羅誌)에 나타나 있다.
이민각(李民覺)
1567 - 1628
조선중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백선(白先), 호는 양와(良窩), 아버지는 음 통덕랑 광철(光哲)이며 어머니는 공인(恭人) 흥양이씨(興陽李氏)로, 희(禧)의 딸임.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 남계서원창건 시 주도적 역할.
이민성(李民宬)
1570 - 1629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관보(寬甫), 호는 경정(敬亭), 아버지는 관찰사 광준(光俊)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선무랑 신권(申權)의 딸임. 일찍이 아우님 민환과 함께 학봉 김성일(金誠一)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한강 정구(鄭逑)·여헌 장현광(張顯光)선생 문하에도 나아가 성리학을 배웠다. 1597년(선조30 정유)에 정시문과(庭試文科)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춘추관기사관을 겸하고 태학문묘중수기(太學文廟重修記)를 찬술하였다.
1602년에는 성균관전적 겸 사헌부감찰에 올랐고, 왕세자책봉 주청사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으며 귀국 후 전적 겸 지제교로 국조실록청교정에 참여하고 병조좌랑, 정랑,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을 역임했다. 1613년 5월 영창대군의 옥사에, 한음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같은 해 6월 다시 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에 제수되고, 이듬해 1614년 9월 부수찬 겸 지평(持平)을 제수 받아 관서경시관(關西京試官)으로 차출 인재의 전형(銓衡)에 참여하였다. 1615년(광해7, 을묘)에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의 부당한, 오리 이원익(李元翼)상공의 상소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자, 그를 구하려고 공(公)과 정경세(鄭經世)·정온(鄭蘊)·이언영(李彦英)등 8인이 극렬히 반대하였으나 대북파에 의해 삭직금고 되어 낙향하였다. 이들 8인은 인조반정후 그 절의가 높다하여 8학사로 추존(追尊)받기에 이르렀다 한다.
1623년(인조원년 계해) 3월에 국왕책봉칙지를 받드는 주청사서장관으로 두 번째 명(明)나라에 갔으나 그곳 경대부들이 조선의 반정에 대해 헐뜯는 모함을 하여 백방으로 방해를 하니 공이 사관(使館)에 머무른 지 9월에 정성을 다하여 글을 올려 충간(忠懇)함이 그들을 감동시켜 다음해 4월에 일을 성공하고 귀국한 공로로 통정(通政)으로 승진 및 토지와 노비(奴婢)를 하사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여헌 선생이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로서 공을 천거하여 좌도의병대장을 삼으니 공이 먼저 전주(全州)에 가서 왕세자를 호위하고 강화가 이루어지자, 강화도에서 임금을 모시고 조정에 돌아왔다. 1628년에 다시 좌승지에 등용되고,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으로 벼슬길을 마감하였다. 선생이 남긴 문집별집, 속집등 20권의 저술은 편편히 주옥이며, 연사창수집(燕槎唱酬集), 동문잡선(東文雜選)은 선인들이 남긴 고시(古詩)와 문장에 버금간다고 하였다. 후일 장대서원에 배향됨. 《敬亭集, 蔡濟共撰 墓碣, 嶺南人物考, 國史大事典》에서 引用함.
이민환(李民寏)
1573 - 1649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이장(而壯), 호는 자암(紫巖), 시호는 충간(忠簡)임. 아버지는 관찰사 광준(光俊)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선무랑(宣務郞) 신권(申權)의 딸임. 1588년 친명에 따라 중형 경정공과 학봉 김성일(金誠一)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고 후일 서애 류성룡(柳成龍), 여헌 장현광(張顯光)선생에게 사사(師事)하였다.
1600년(선조33, 경자년)4월에 별시병과에 급제하여 검열, 대교, 봉교를 거쳐 세자시강원사서와 사간원정언 등 여러 직을 역임하고, 병조좌랑과 홍문관수찬에 등용되었다. 1605년(선조38, 을사)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되고, 평안도 순무어사 겸 암행어사 시에는 감사의 군정시책을 규탄하고, 장계하여 파직케 하였으며. 이어서 영천과 충원의 수령을 역임한 뒤, 일시 귀향하여 퇴계선생의 향약(鄕約)을 보완하여 강목을 설정하고 향중제생들이 후풍(厚風)과 문풍(文風)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618년(광해10, 무오) 7월 후금後金의 요동 침공 시, 명明의 원군요청으로 파병되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의 문종사관으로 참전하였으나 명의 패전으로 포로가 되어 청군淸軍의 노성虜城으로 끌려가 책중柵中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은 전진戰塵의 역경에서도 조문록을 저술하였다. 선생이 기록한 조문록은 출진부터 책중 생활 17개월, 방면귀국 시까지 25개월의 일기로, 충무공의 난중일기, 청나라의 나선정벌羅禪征伐 때 신류申劉의 북정北征일기와 비견된다. 1620년 7월 4일 석방되어 의주에 이르렀을 때 파병당시 군량보급지연으로 선생으로부터 질책을 받은바 있는 박엽, 윤수겸 등의 모함과 무고로 1년 이상을 평양, 숙천 등지에 체류하면서, 건주문견록을 저술하고, 비어6조備禦六條로 소疎를 올려, 명을 기다리던 다음해(1621) 6월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4년에 걸친 포로와 체류기간에 남긴 명저名著는, 민족사에 남을 업적 중에 비중 높은 작품이다. 그 중 「비어6조소」 는 만주지방의 지세와 여진족의 풍습, 청군의 허실을 상세히 기록하고 말미에는 그들의 침입을 제어할 수 있는 국방강화의 현책6조문을 담고 있다.
이 6개소는 실제 전투에서 효율성이 인정될 만큼 실천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었으나, 이이첨 등에 의해 묵살되어 버려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백여 년 뒤 해동명소(海東名疎)와 동번대의(東藩大義)에 등재되었다. 오늘날 일본방위청에서 참고 교재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1978년 중국 요녕대학(遼寧大學)에서도 이 책을 발간했으니 선생의 큰 뜻을 미루어 알 수 있다.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특소(特召)되니 당시 사관 임숙영(任叔英)이 선생의 진충대절을 한(漢나)라 가의(賈誼)의 절의에 비유하면서 찬양하였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당시는 여헌(旅軒)선생의 추천으로 영남호소사종사관의 임무를 완수하고 고향에 돌아와 문소지(聞韶誌), 추요문답(芻蕘問答), 박약집(博約集), 제동잡기(齊東雜記) 등을 편찬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영하(嶺下) 동지들이 모여 의병모집을 도모하였다. 1638년(인조16,무인) 2월 통례원 좌통례에 제수되고 7월 비변사의 천거로 동래부사로 제수되어 해안지방의 특유한 아전들이 법을 악용한 민폐를 타파하고 지방교육에 힘을 섰음.
이듬해 기묘년 9월에 관직을 내놓고 잠시 낙향하였다가 다시 장례원판결사, 호조참의를 거쳐 1644년(인조22, 갑신)에 형조참판, 1645년5월 경주부윤을 지냈으며 호성원종훈 2등(扈聖原從勳二等) 녹훈(錄勳)되었다. 1860년(철종11,경신)에 자헌대부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지 춘추관 성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에 특증(特贈) 되었으며, 다음해 충간(忠簡)이란 시호가 내렸다. 유집(遺集)으로 자암집(紫巖集)이 있음. 《申悅道行狀, 嶺南人物考, 國史大事典, 嶺南鄕約資料集成》에서 引用하였음.
이민개(李民愷)
1575 - 1603
조선중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효장(孝壯), 호는 청암(晴岩). 아버지는 관찰사 광준(光俊)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선무랑(宣務郞) 신권(申權)의 딸임. 창선교위 용양위 부사과(彰善校尉龍驤衛副司果)를 지냄.
이제육(李齊陸)
조선중기의 무신. 본관은 영천(永川), 아버지는 증 공조판서 민홍(民宖)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상산 주씨(商山周氏)로, 부장(部長) 명신(命新)의 딸임. 선조 때 관찰사 학동 광준(光俊)공의 손자임. 공은 무과를 거쳐 정2품 무지사(武知事)에 이름, 공은 힘과 무예(武藝)에 뛰어났고 1618년(광해10, 무오)에 심하지역(瀋河之役),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정(出征)한 자암(紫巖)공을 수행하여 호지(胡地)에 들어갔다. 자암공의 수차에 걸친 자결(自決)의 계(計)는 조카 제육(齊陸)에 의하여 번번히 힘으로 억제되었다 한다. 자료가 화재로 일실(逸失)되어 상세함이 전하지 못함이 아쉽다. 이상은(영천이씨 세보)引用함.
이정설(李廷卨)
1600 - 1652
조선중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자후(子厚), 호는 관봉(冠峯). 아버지는 내헌 민협(民協)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잠(潛)의 딸임. 이유행천승 절충장군부호군(以儒行薦陞 折衝將軍 副護軍)
이정상(李廷相)
1602 - 1672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입경(立卿), 호는 순호(蓴湖), 아버지는 자암 민환(民寏)공의 장남. 일찍이 사마시를 거쳐 1638년(인조 무인)에 문과정시(文科庭試)에 올라 정언, 좌랑, 고령, 예천, 김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공은 지조(志操)가 견정(堅定)하고 문학이 정심(精深)하여 항상 도리를 다하고 분에 넘치는 일은 탐하지 아니하였다. 이상은(永川李氏 世譜)에서 引用
이정기(李廷機)
1613 - 1669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자신(子愼), 호는 만옹(漫翁), 아버지는 자암 민환(民寏)공의 제3자로 중부(仲父) 경정(敬亭)공이 후사(後嗣)가 없어 입후(入后)하였다. 여헌 장현광(張顯光)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으며 1648년((인조26, 무자)에 문과별시 식년시(式年試)에 급제, 성균관학유, 교수 훈련도감 랑청, 승정원주서, 김천도 찰방, 순천, 서흥부사(瑞興府使), 충주목사를 거쳐 통례원좌통례에 이르다.
순천에 이어 서흥부사(瑞興府使)로 있을 떼 선치(善治)를 배풀어 통정의 위계(位階)에 올랐으며 좌통례로 부임할 때도 신하로서 어찌 벼슬자리의 높고 낮음을 가리겠느냐 하면서 의연(毅然)히 부임하였다 한다. 만년에 선대인의 유지를 받들어 연어정(鳶魚亭)을 적라대암상(赤羅臺岩上)에 짓고 벼슬을 버리고 종로(終老)의 계를 정하니 학자들이 분집(坌集)하매 교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國史大事典, 海左丁範祖撰 墓碣銘》에서 引用하였음.
이정지(李廷枝)
1620 - 1694
조선조중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자무(子茂),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민개(民愷)이며 어머니는 숙인(淑人) 풍천임씨(豊川任氏)로 주부(主簿) 내중(乃重)의 딸임. 1661년(현종, 신축)에 무과에 등제 벼슬이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 부사과(龍驤衛 副司果)에 이르렀다.
이인징(李寅徵)
1649 - 1693
조선중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문옹(文翁), 아버지는 필형(必炯)이며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호군(護軍) 영발(英馞)의 딸임. 무과급제, 어모장군 행 훈련원 주부(禦侮將軍 行 訓練院 主簿)
이중훈(李重勳)
1656 - 1715
조선중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집중(集中), 아버지는 충주목사 정기(廷機)이며, 어머니는 증 숙인(贈淑人) 연안이씨(延安李氏) 군수(郡守) 분(衯)의 딸임. 숙종 병진년(1676) 무과급제 첨지사(僉知事)
이기징(李起徵)
1667 - 1733
조선중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 진오(振吾), 호 송죽당(松竹堂), 아버지는 필찬(必燦)이며 어머니는 부림홍씨(缶林洪氏)로 가선(嘉善) 여적(汝績)의 딸임. 영조 무신년(1728) 적변(賊變)에 의병을 일으키고, 화산(花山)의 구성(舊城)을 수리(修理)함.
이수형(李秀馨)
1678 - 1729
조선중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문원(聞遠), 호는 풍헌(淸風軒). 아버지는 만흥(晩興)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 임. 선략장군 용양위 부사과(宣略將軍 龍驤衛 副司果)
무신창의 6의사(戊申倡義六義士)
영조(英祖)즉위 후 노소론(老少論)이 대립하여 오다가 영조3년 노론이 일부 실각(失脚)하자 소론 김일경(金一鏡)의 잔당(殘黨)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良)이 반란하여 기세가 자못 우심하여 청주(淸州)에서 관군이 패(敗)하고 안성(安城), 죽산(竹山) 등을 위협하니 의기 있는 선비들이 창의(倡義)하였다. 의성지방에서는 약무재(若無齋)공이 수창(首唱)하여 의병장에는 신렴(申濂)이 5종반(五從班)은 군문(軍門)의 각직을 다음과 같이 담당하였다.
이수태(李秀泰 : 1673-1734) | 호 석포(石圃) 참모관(參謀官).
이수규(李秀逵 : 1673-1732) | 호 설월(雪月) 사병도총(司兵都摠).
이수재(李秀載 : 1694-1750) | 호 덕후(德厚) 모량도감(募糧都監).
이수춘(李秀春 : 1675-1740) | 호 약무재(若無齋) 도서기(都書記).
이수시(李秀時 : 1685-1731) | 호 우재(愚齋) 모량도감(募糧都監).
이덕룡(李德龍 : 1693-1743) | 자 정중(正中) 일기유사(日記有事).
이상은 《戊申倡義錄》에서 引用함.
이유천(李惟天)
1695 - 1771
조선중기의 무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여칙(汝則), 호는 예포(藝圃), 아버지는 처사(處士) 수강(秀堈)이며 어머니는 재령이씨(載寧李氏) 통덕랑 이현(李炫)의 딸임. 1730년(영조, 경술)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겸 삼척영장(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兼三陟營將)을 지내다. 《永川李氏世譜》에서 引用
이명천(李命天)
1708 - 1796
조선조후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성중(性中), 호는 와운재(臥雲齋). 아버지는 생원 수지(秀墀)이며 어머니는 宜人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진사(進士) 빈(份)의 딸임. 식산 이만부(息山 李萬敷), 호수 정규양(箎叟 鄭葵陽), 옥천 조덕린(玉川 趙德鄰)의 문하에서 수학, 문학과 덕행으로 당대제현(當代諸賢)들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았다. 당시의 행장(行狀)과 묘갈명(墓碣銘) 등이 공의 글로 이루어진 것이 많았다. 1794년(정조 갑인) 수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壽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됨. 遺集2券과 退溪集註5권이 있음. 《영천이씨 세보》
이의빈(李宜贇)
1715 - 1741
조선후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미겸(美兼), 호는 임계(臨溪), 아버지는 삼척영장 유천(惟天)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월성손씨(月城孫氏)로 진사 경욱(景郁)의 딸임. 1740년(영조 경신)에 무과에 급제함.
이후춘(李後春)
1722 - 1794
조선중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화(士華), 호는 철당(哲堂), 아버지는 처사(處士) 팽령(彭齡)이며 어머니는 평해구씨(平海丘氏)로 두남(斗南)의 딸임. 공는 성품이 온화하고 공손하여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공양을 극진히 하니 일가친척이 경복하다. 정려(旌閭)의 명이 내렸고 유고(遺稿)가 있음.
이상발(李祥發)
1745 - 1834
조선후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구지(久之), 호는 손암(遜庵), 아버지는 처사(處士) 의백(宜白)이며,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진사 정개(廷藎)의 딸 임. 1790년(정조, 경술) 진사시에 장원급제, 문장가로 대성하여 그 명성이 일세를 떨쳐 영남좌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1794년(정조, 갑인) 왕명 의한 응제시(應製試)에 장원하여 선정전(宣政殿)에서 인견의 영광을 얻었다. 당대의 거장(巨匠) 번암(樊巖) 채제공(蔡濟共)·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 등 모두가 공을 추중(推重)하였다. 遜庵遺稿가 있음. 《永川李氏 世譜》
이의명(李宜明)
1745 - 1791
조선후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계준(季俊).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덕방(德祊)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예안김씨(禮安金氏)로 통덕랑 홍렬(弘烈)의 딸임. 자(子), 희발(羲發) 귀(貴)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子 羲發 貴,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이의과(李宜果)
1754 - 1820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초휘(初諱) 몽룡(夢龍), 자는 여의(汝翼), 호는 송강(宋岡), 아버지는 재천(載天)이며 어머니는 부림홍씨(缶林洪氏)로 우삼(宇三)의 딸임. 1795년(정조, 을묘)에 문과별시급제, 교서관박사, 춘추관기주관 동지중추부사관 지제주판관 겸 제주 진 병마절제 도위감 목사(春秋館記注官 同知中樞府事官 至濟州判官兼 濟州鎭 兵馬節制 都尉監牧使)
이희발(李羲發)
1768 - 1850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우문(又文), 호는 운곡(雲谷), 시호(諡號)는 희정(僖靖). 아버지는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의명(宜明)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로서, 덕은(德殷)의 딸임. 1779년 부친의 명에 따라 남와(南窩) 정동필(鄭東弼)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으며, 1795년(정조19, 을묘) 3월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예속되고, ○4월에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어 규장각(奎章閣)을 거쳐 괴원(槐院), 사헌부(司憲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승정원(承政院)을 두루 역임하고 대사간(大司諫), 한성부좌우부윤(漢城府左右府尹),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다.
등과(登科)후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어 정조(正祖)의 공에 대한 총애는 대단하였다. 초계문신들은 호학(好學)의 정조를 모시고 매일 밟고 의리가 분명함에 앞으로 기대가 크다고 하였다.
공이 내직에 계실 때 당시 문란했던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실태 과도한 세금 및 부역(賦役)에 시달리는 실정, 매관매직 등의 부정부패를 없애 국정쇄신을 해야 한다는 상소를 거듭 올렸다. 또 지방수령직에 부임하면서 이러한 폐단을 혁파하여 관기(官紀)를 바로잡고 주민의 생업을 돌보는 목민관으로서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부임하여 선치를 하자 이 소식을 듣고, 고향을 버리고 떠난 주민들이 다시 모여드니 황폐한 해안지방이 옛 활기를 찾기도 했다. 영월부사(寧越府使)로 부임했을 때 주민을 괴롭히고 생업을 위태롭게 하는 폐단을 시정하고 공의 봉록(俸祿)으로 양사재(養士齋)를 지어 퇴폐해 가는 문풍을 진작시켰다.
공은 82세 때 형조판서(刑曹判書)직을 제수 받았다. 조선조 후기 세도정치가 성행한 당시, 남인(南人)의 학자로서 현직 형조판서 직을 제수 받았음은 공의 학행과 덕망을 가늠할 수 있다. 저서로는 문집22권이 있고 용학강의(庸學講義)와 주서방식(朱書放寔)은 왕명에 의하여 정조의 문집 홍제집(弘濟集)에 수록되어 있다.
이가발(李家發)
1776 - 1861
조선후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영숙(英叔). 호는 소우(素于).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의명(宜明)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파평윤씨(坡平윤氏)로 덕은(德殷)의 딸임. 헌종 때의 형조판서 희발(羲發)의 아우임. 1801년(순조1, 신유)에 생원시에 등제. 1820년(순조20, 경진)에 김이소(金履素)가 조정에 있어 문학과 덕행이 뛰어남으로 천거되어 제능참봉(齊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천(薦)하는 글에 '의리에 밝고 문장에 뛰어나다'고 하였다. 다시 1834년(순조34, 갑오)에 왕으로부터 고명한 학자를 천거하라는 명이 있자 공이 수석으로 천거되어 통정대부의 위계와 부호군(副護軍)에 첨중추(僉中樞)를 제수하였다. 1860년(철종, 경신)에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 이듬해(1861)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았다. 공은 덕망이 있어 당세의 귀감이 됨으로 많은 선비들이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음에 추중(推重)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상은《永川李氏 世譜》에서 引用함.
이노익(李魯翼)
1791 - 1833
조선후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경부(敬夫), 아버지는 처사(處士) 지발(知發)이며 어머니는 선성김씨(宣城金氏)로 통덕랑 헌(櫶)의 딸임.
양부(養父)모시기를 친부(親父)처럼 했고 대호(大虎)도 감동했다는 고사(故事)가 구전(口傳)되어옴, 효행과 학행으로 증 조봉대부 동몽교관(朝奉大夫 童蒙敎官) 정각(旌閣)을 명하다.
이명재(李明在)
1794 - 1886
조선말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칠지(七之), 호는 력암(櫟庵),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노문(魯文)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종질(宗質)의 딸임. 일찍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가졌으나 세상에 펴지 못하니 모두가 아쉬워했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의 수직(壽職)을 받다.
아주신씨(鵝洲申氏)
1793 - 1821
이익수(李益修)의 처(妻)이며 부도(婦道)로 시부모(媤父母)를 지성껏 섬겼으며 남편이 성시(省試) 후 괴질에 걸려 돌아가셨다. 북받치는 설음을 삼키면서 시부모를 안심시키고 입관(入棺)을 마친 후 조용히 목메어 따라 죽으셨다. 홍문(紅門)으로 표창하라는 특명이 내림. 열부(烈婦)임.
이의노(李宜老)
1794 - 1869
조선후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원백(元佰), 호는 운창(雲傖), 아버지는 동산재(東山齋) 급(芨)이며 어머니는 성산이씨(星山李氏)로 동오(東五)의 딸임. 공은 효행으로 조봉대부 동몽교관(朝奉大夫童蒙敎官)에 증직되고 왕명(王命)으로 정려(旌閭)의 은전(恩典)이 내렸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여 모병(母病)에 그 아픔을 대신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전림(前林)에 좋은 약이 있노라 일러주기에 가보니 과연 거위가 있으므로 약으로 다려 드렸더니 효험이 있었다. 이일은 주역(周易) 조하(條下)에 우귀휘설(禹貴彙設)과 일치되는 일이라 하겠다. 유고(遺稿)가 있음.
이관재(李寬在)
1845 - 1896
조선말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순교(舜敎), 호는 신암(愼庵). 아버지는 소헌 노성(魯誠)이며 어머니는 아주신씨(鵝洲申氏)로 광철(光喆)의 딸임. 1896년(고종, 병신)에 정국의 혼란을 틈탄 난병(亂兵)들이 마을에 침입하매 사람들이 모두 달아났다. 공은 선세(先世)의 사판(祠版)이 병화(兵火)를 입을까 염려하여 묘우(廟宇)에 들어가 뫼시고 나올 때 난병(亂兵)들이 총을 난사하여 죽음.
이종무(李宗武)
1845 - 1914
조선후기의 인물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치선(致善), 호는 농헌(農軒), 아버지는 덕재(德在)이며 어머니는 아주신씨(鵝洲申氏)로 정인(正仁)의 딸임.
수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壽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 유고(遺稿)로 농헌일고(農軒逸稿)가 있음.
이장섭(李章燮)
1854 - 1907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이일(理一), 호는 죽파(竹坡). 아버지는 철재(澈在)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교(敎)의 딸임. 백부(伯父)연재(淵在)공 앞으로 입후(入后)하였다. 1888년(고종, 무자)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올라 주서(注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지제교겸 경연시독관(知製敎兼經筵侍讀官)에 이르다.
공은 금악(錦嶽) 철재(澈在)공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伯父) 연재(淵在)공 앞으로 입후(入后)하였다. 효행과 우애가 지극하여 일찍 생부 금악공을 모시는 처소로 따로 이 한 집을 지어서 갖추니 종당(宗黨)들이 돈목(敦睦)하는 장소로 삼았다. 성품이 온화하여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고, 화내는 얼굴빛을 남에게 보이는 일이 없으며 천미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아니하였다.
의표는 준엄하고 단정하여 사람들에게 대함에 화기가 애연(藹然)한 고로 공경하고 즐거워하였다. 벼슬길에 올랐으나 세태가 정상아님을 알고 갑오(甲午)이후는 벼슬자리를 그만두고 문을 닫고 계시다가 몸과 마음에 험 없이 돌아가시니 사람들은 공의 지조에 경복하였다.
이상은 《永川李氏 世譜》에서 引用함.
이장봉(李章鳳)
1869 - 1896
조선말기의 인물.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익서(翼瑞)), 아버지는 신암 관재(寬在)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환(瓛)의 딸임. 1896년(고종, 병신)4월13일 병신창양(丙申搶攘) 때 선세(先世)의 사판(祠版)을 뫼시고 나오는 부친 신암공(愼庵公)을 구하려고 몸을 날려 부친의 몸을 덮쳤으나 끝내 부자(父子) 양대(兩代)가 몸을 잃어 일가 양 효(一家兩孝)를 이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