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묘(墳墓) 및 비석(碑石)
- 등록일
- 2019-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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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트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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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題] 告同胞 (동포들에게 고함)
검은 무리 땅에 가득 세월은 흘러가네.
쇠를 녹인 모진불도 밤지나면 재가 되리
언제일까 하늘의 뜻 내 어이 알랴마는
응당이 우리겨레 좋은시절 맞으리라.
黑雲滿地移時日
烈火燃金到夜灰
早晩天心吾未識
同胞應見好風來
경산(耕山) 이태직(李泰稙 | 1878-1913) 구한말독립운동가, 애국지사.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자는 대능(大能), 호는 경산(耕山), 아버지는 시산(是山) 장수(章秀)이며, 어머니는 문소김씨(聞韶金氏)로 진만(鎭萬)의 딸임. 공은 일찍부터 성품이 강개(慷慨)하고 의를 중히 여기며 작은 일상사에는 사람들과 다툼이 없으나 대의에는 백절불굴(百折不屈)하는 기개가 있었다.
광무(光武) 을사년에 망국의 조약 체결 후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선생과 함께 항왜운동을 하다가 누차(屢次) 구치(拘置)되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서울의 뜻있는 동지들을 방문하려 했으나 그들의 철저한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동지 김동삼(金東三)과 중국에 망명을 하려 했으나 역시 일경(日警)의 감시와 누차의 구금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함에 타고난 성격에 사불여의(事不如意)하니 병석에 눕게 되었다. 모든 약을 전각(全却)하고 금성산(金城山) 하 소옥(小屋)에 이거하여 외인 내방(來訪)도 사절하다가 1913년(계축)에 36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치다.
그 후 고을 유림(儒林)들이 경산계(耕山契)를 조직하여 공의 유지를 이어오다가 1967년 기념 사업회를 발기하여 1971년에 공의 향리 산운리(山雲里) 입구에 기념비를 제막하였다.
훈장증 제2126호 (1990년12월21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됨.
〈參考文獻〉 - 《永川李氏의 淵源과 그 세계》·《永川李氏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