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묘(墳墓) 및 비석(碑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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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공(僖靖公) 운곡(雲谷) 이희발(李羲發)선생 신도비
등록일
2019-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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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북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이희발(李羲發 : 1768-1850) |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우문(又文), 호는 운곡(雲谷), 시호는 희정(僖靖).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의명(宜明)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로서, 덕은(德殷)의 딸임. 남와(南窩) 정동필(鄭東弼)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795년(정조19, 을묘)3월에 문과별시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예속되고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었다, 예조와 병조좌랑,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장령, 동부승지, 대사간,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영해, 영월부사, 한성부 좌우부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러 8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고 조선조 후기 사조(四朝)의 명신으로 희정(僖靖)이란 시호(諡號)가 내렸다. 《著書로는 雲谷集 21券》이 있다. 이 신도비는 선생의 6世孫 炳稷께서 여러 후손들의 뜻을 모아 2000年 묘역으로 가는 금성산 남쪽 들머리에 건립하였다. 비신(碑身)의 큰 글자는 세운이의 외숙부 되는 광산인 金澤鎭의 글씨이며 4000餘 字의 비명은 경정 종손 시하(時夏)께서 심혈을 기울여 썼다. 비명(碑銘)의 지은 이는 崇政大夫 行 議政府 左參贊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豊山 洪祐順이다.


〈參考文獻〉 - 《國譯 雲谷先生文集 年譜》·《永川李氏의 淵源과 世系》



[자헌대부 형조판서 시 희정공 운곡선생 신도비명 병서(資憲大夫 刑曹判書 諡 僖靖公 雲谷先生 神道碑銘 幷序)]


議政府 左參贊 洪祐順  撰

어느 날 상사 이유재(李維在)군이 그의 왕대부의 실적(實蹟)을 엮어 행장(行狀)을 나〈우순(祐順)〉에게 주며 말하기를 “우리 왕대부깨서는 네 조정(四朝廷)의 옛 신하입니다. 관력(官歷)과 연세는 무릇 사람들이 모두 말하지만 지행(志行)의 독실(篤實)함과 출처(出處)의 올바름은 글로서 알리지 않으면 후세에 어찌 징험하겠습니까? 돌아보건대 묘도에 세운 비각(碑刻)이 오래되었기에 감히 이렇게 누를 끼쳐 영원히 전해지기를 도모(圖謀)하려 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우순(祐順)〉이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곧 말하기를 “아, 아름답도다! 행장(行狀)이여, 내 어찌 그대 왕대부의 덕과 행실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우리 선고(先考) 정간공(靖簡公)께서는 남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성품이었는데 공을 언급할 때 마다 자주 탄식하시기를 “군자다운 사람이로다.” 라고 하였다. 대개 공은 정조(正祖) 때에 초계문신에 뽑혔고 당시 선군(先君) 또한 참여하였다. 일찍이 밤낮의 강제(講製)에 서로 뒤따르며 힘쓴 것이 거의 여러 해였다. 공이 언행을 할 때는 그 모든 것을 질의함이 있으므로 공을 아는 이는 우리 선군만한 이가 없는데, 선군께서 이것으로 후생을 경계한 것을 내가 받은 적이 있다. 그러므로 공을 흠모하고 복종하는 이도 나만한 이가 없기에 붓을 잡아도 거의 부끄러운 빛이 없는데, 감히 명(銘)을 하지 않겠는가.

공은 휘가 희발(羲發)이고, 자가 우문(又文)이며, 자호가 운곡(雲谷)이다. 처음 휘는 영발(英發)인데, 익묘(翼墓 효명세자)의 휘를 피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영천이씨(永川李氏)는 고려 영동정(領同正) 휘 박(磗)이 상조가 되고, 4세 휘 휘(暉)는 관직이 신호위 상장군(神號衛上將軍)으로, 합단적(哈丹賊)을 토벌한 공이 있어 원나라 황제가 옥새를 찍은 친서로 칭찬하였다. 고려 말에 려(麗)가 구호(國號)로 이름 한 것은 고국(古國)을 잊지 못한다는 뜻을 붙인 것으로, 마침내 은둔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 휘 세헌(世憲)은 호가 우암(牛巖)이며 진사로 학문과 덕행이 사림에서 제향을 드리며, 대산(大山) 이(李) 선생이 유허비문을 지었다. 이 분이 휘 여해(汝諧)를 낳으니 유일(遺逸)로 참봉이다. 이 분이 휘 광준(光俊)을 낳으니 관찰사를 지냈고, 호는 학동(鶴洞)이며, 비로소 의성 산운(山雲)에 살았다. 휘 민환(民寏)을 낳으니 참판을 지냈으며 호는 자암(紫巖)이다. 형 경정공(敬亭公)과 여헌(旅軒)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2세를 지나 휘 중렴(重燫)은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수춘(秀春)은 좌승지에 추증되고 무신년①에 의병을 일으켰다. 할아버지 휘 덕방(德祊)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의명(宜明)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니,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윤덕은(尹德殷)의 따님으로 군수 윤홍명(尹弘鳴)의 후손이다.

공은

◎영조44, 무자년(1768) 1월 16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라 대인(大人)과 같았고, 스스로 밥 먹을 때가 되어 판서공께서 좋아하시는 음식은 자기 입에 넣지 않았다. 겨우 배움을 시작하면서 재능이 뛰어나 한 번 들으면 문득 암송하였다. 성품이 침착하고 중후하여 장난치고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끝까지 어버이 곁을 떠나자 않았다. 9세 때에 어떤 관리가 세금 독촉이 매우 심했는데, 공께서 정색하고 보니 관리가 두려워 자신도 모르게 엎드렸다. 그 기상(氣像)과 사색(辭色 말과 얼굴빛)이 남을 경외(敬畏)시킴이 어렸을 때부터 그러하였다. 10세 때에 태정부인(太貞夫人)이 부종(浮腫)을 심하게 앓았는데, 공께서 정성을 다해 간호하여 마침내 완쾌되니 보는 이들이 감탄하였다. 당시 중씨(仲氏) 침랑공이 어려서 강보(襁褓)에 있었는데, 늘 정부인이 식사할 때는 안고 밖에 나가 식사를 편히 할 수 있게 하였다.

◎기해년(1779)-12세에 판서공의 명으로 남와(南窩) 정동필(鄭東弼) 공에게 수업하였는데, 정공께서 아름답게 여겨 판서공에게 편지를 보내 치하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님이 연세가 많았는데, 과거 공부를 한지 얼마지 않아 사서(四書)에 통달하였고 대책문(對策文)을 지어 이미 명성이 자자하였다. 일찍이 달성(達城)의 산사(山寺)에서 독서하였는데, 어떤 한 노승(老僧)이 예의를 표하며 말하기를 “소승이 많은 사람을 겪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올바른 군자를 만났습니다.”라고 하였다.

◎기유년(1789)에 성균관 시관(試官)에 나아갔는데 마침 연말이 되어 서울의 인사들이 놀이에 함께 가자고 강요하였다. 공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부모님을 떠나온 그리움이 이때에 더욱 간절하여 여러 사람을 따라 기뻐하고 즐길 겨를이 없다.”라고 하니 동료들이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신해년(1791) 1월에 부모님을 뵈려 내려왔는데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판서공의 상을 당하였다. 공은 효도를 다하지 못해 더욱 통한스러웠으나 대부인이 계셨기 때문에 겨우 연명할 수 있었다. 장지(葬地)가 30리 밖에 있었으나 초하루 보름에는 반드시 성묘하였고 추위와 더위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정조19, 을묘년(1795)에 대책(對策)으로 생획(栍劃)②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금께서 직접 시권을 보고 학문이 넓고 고상하다고 칭찬하였다. 얼마지 않아 ○승문원에 예속되고, 곧이어 ○규장각(奎章閣)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었으니 임금의 특별한 명이었다. 공께서 숙명(肅命)하니 임금께서 특별히 선온(宣醞)을 내리고 이어 내리신 수라를 거두어 공에게 주기에 태부인에게 보내니 향리에서 영광스럽게 여겼다. 응제(應製) 때 마다 임금께서 조문(條問)한 것은, 이기(理氣)의 선후와 비은 중화(費隱中和)의 체용과 덕성 문학(德性問學)의 경중 및 《중용》·《대학》 강의와 국전고식(國典故寔) 등으로, 모두 그 뜻이 심오하고 원류가 드넓은 것이었다. 하찮은 선비가 증험할 만한 것이 아니었으나 공은 문득 정주(程朱)의 가르침을 예로 들고 제가(諸家)의 설을 두루 인용하여 깊이 생각하고 궁구하여 정밀하고 상세하게 아뢰니, 임금께서 칭찬하시기를 “영남 사람은 경의(經義)에 가장 해박하다.”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비답을 내리기를 “질박함이 많고 문식(文飾)이 적으며,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위함에 일심(一心)을 깨끗하게 하여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내가 이런 까닭에 너희들에게 바람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루는 제신들에게 명하여 자리를 나누어 앉게 하고 시(詩)·부(賦)·표(表)·론(論) 각각 한 문제를 시험하였다. 제목의 뜻이 심오하고 막연하여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여러 동료들은 모두 온전히 시권을 채워 요행으로 맞히기를 기대하였다. 공 홀로 임금의 앞에 알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쓸 수 없다하고 백지 답안을 올리니, 임금께서 “임금을 섬김에 속임이 없고 결백하고 정직하여 가상하다.”라고 비답을 내리고, 억지로 답안지를 채운 자들을 질책하였다. 일찍이 《노걸대(老乞大)》 한 부를 강론하였는데, 《노걸대》 는 한어(漢語)이므로, 분명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공께서 한 번 보고 외워 한 글자도 틀림이 없으니, 임금께서 총명함이 무리에서 빼어나다고 칭찬하였다.

◎정조21, 정사년(1797)에 명릉(明陵) 별검(別檢)에 제수되고

◎무오년(1798)에 효를(孝陵) 별검에 옮겨졌다.

◎기미년(1799)겨울에 친시(親試)에서 세 차례나 장원을 차지하여 6품에 올랐다.

◎순조5, 을축년(1805) 예조좌랑에 배수되었다. 당시 전장(銓長 이조판서)이 문신 겸 선전관 에 수망(首望)에 올렸는데, 어떤 사람이 품계를 뛰어 넘은 것에 대해 말하기를 “영남에서 경학(經學)을 한 선비가 어찌 낭관(郞官)을 기대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병인년(1806)에 병조정랑에 배수되고 얼마 뒤 사간원 정언에 배수되었다.

◎정묘년(1807)에 사헌부 지평에 배수되고,

◎무진년(1808)에 또 지평에 배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물러났다.

◎기사년(1809)에 사헌부 장령에 승진 배수되고, 여름에 고산 찰방(高山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모친이 늙고 길이 멀다며 부임하지 않았다.

◎순조11, 신미년(1811)에 또 ○장령에 배수되어 구언소(求言疏)를 올려, 장률(贓律)을 엄히 하고 청렴결백한 선비를 선발하여 하늘의 견책(譴責)을 막으라고 청하니, 임금께서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셨다. 또 이어 사직하면서 〈일강구목소(一綱九目疏)〉를 올렸는데, 그 강(綱)에 “성인의 학문을 밝히는 것.”에 대해 말하였고, 그 목(目)에 “현명하고 사특한 사람을 분별할 것, 언로(言路)를 열 것, 어진 수령을 간택할 것, 검소한 덕을 숭상할 것, 도예(陶藝)를 중하게 여길 것, 기강을 떨칠 것, 염치(廉恥)를 장려할 것, 무사(武事)를 강구할 것, 본질에 힘쓸 것.“등 모두 수천 언(數千言) 이었는데, 임금께서 ”간절하고 절실하다‘고 비답을 내리고, 그 가운데 채택된 것은 묘당(廟堂)에서 멈추어 시행되지 못했다. ○사간원 헌납에 배수되었다.

◎을해년(1815) ○사간원 사간에 배수되고, 가을에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으나 어떤 관료가 저지하여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병자년(1816)에 ○군자감정에 배수되고, 겨울에 ○영해부사에 제수되었다. 고을 주민들이 어업으로 생활하며 부역과 세금에 시달렸는데, 공께서 아전의 간사한 짓을 척결하고 조례를 엄히 하여 법률 외의 세금은 모두 감면하니, 이에 유민들이 돌아와 호구가 증가하였다. 학정(學政)을 펼쳐 고을의 선비들과 상읍례(相揖禮)를 행하고 옛날 향사 독법(鄕射讀法)과 비슷하게 하여 당에 올라 술잔을 돌리니, 예의로운 모습이 질서정연하여 볼만하였다. 고을에 의심스러운 옥사가 있어 수 10년 동안 해결되지 않았는데, 공께서 원통한 소를 엄히 조사하여 석방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게 되자 고을 백성들이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기묘년(1819)에 사간에 체배(遞拜)되고, 다시 사헌부 집의에 배수되었다.

◎경진년(1820) 3월에 사간에 배수되고, 다시 집의에 배수되었다.

◎신사년(1821)에 집의에 배수되어 유지에 응하여 시폐소(時弊疏)를 올렸다.

◎임오년(1822)에 사간에 배수되고,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에 체배(遞拜) 되었다. 당시 익묘(翼廟)께서 동궁에 계셨는데 공께서 여러 번 서연(書筵)에 들어가 아룀이 자세하고 분명하였고 권면하는 것이 간절하고 지극하니, ‘참으로 시강원의 인재이다, 라는 칭찬이 있었다.

◎계미년(1823)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연세가 육순을 넘었으나 질대(絰帶)를 몸에서 벗지 않았다. 제전(祭奠)을 올리는 여가에 손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글 및 〈자경편(自警編)〉을 베껴 항상 눈앞에 두고 성찰(省察)하였다.

◎을유년(1825)에 복을 마치고 집의에 배수되고, 또 사간에 배수되었으나 또 모두 사직을 아뢰었고 이어 동궁을 보익(輔翼)하는 소(疏)를 올리기를 “정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군주가 하루사이에 어진 선비와 대부를 만나는 시간은 많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가까이하는 시간이 적다면, 기질을 함양하고 덕성을 기를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나라에 궁료(宮僚)를 설치한 것은 실로 옛 법도를 따랐으나, 나아가서 만나는 시간은 항상 적고 서연(書筵)의 강의는 수 십 줄을 읽고 한 두 단락의 문의(文義)를 설명하는데 불과합니다. 그러나 모시면서 한가하고 온화하게 인도하는 실제가 없으니, 예전에 아침저녁으로 기거하면서 옆에서 받들어 보필하던 뜻은 더욱 아닙니다. 지금 서늘한 가을이 점점 다가와 강연이 비록 관례대로 열리니, 세자빈객(世子賓客)과 관리들도 불시에 불러서 만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혹 경전의 의리를 반복하여 어려운 것을 묻기도 하고, 고금일의 변천을 참고하고 고증하여 아래로 민심과 세태 그리고 농사의 어려움에 이르기까지 또한 자문하고 헤아림이 있다면 총명한 지혜를 개발하고 덕업을 완성하는데 실로 작은 도움이 될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임금께서 기쁘게 받아드리시어 특별히 ○승정원 동부승지에 승진되고 이어 ○돈영부 도정에 배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물러났다.

◎순조26, 병술년(1826) 영월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영월은 관동(關東)의 산골이었다. 백성들은 가난하여 폐해가 더욱 많았고, 풍속은 질박하여 문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공께서 도착하여 곧 백성들의 여섯 조목을 들어 개혁하였다. 또 월급을 덜어 양사제(養士齋)를 설치하고, 매월 초하루 고강(考講)하며 백록동규(白廘洞規)를 힘쓰게 하니, 이에 문교(文敎)가 번성하였다. 떠나게 되어서는 백성들이 동비(銅碑)를 세워 칭송하였다.

◎무자년(1828)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고,

◎경인년(1830)에 다시 동부승지에 배수되었다.

◎순조33, 계사년(1833) 5월에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헌종 9, 계묘년(1843) 봄에 헌종(憲宗)께서 화성(華城 수원)에 행차하였다. 정조 때의 시종신을 추념하여 특별히 가선대부에 승진되었고, 한성부 우윤에 제수되고 다시 좌윤에 제수되었다. 다시 좌윤과 우윤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고 성학(聖學)에 힘쓰라는 소를 올렸다.

◎을사년(1845) 4월에 체직되어 용양위 호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다. 

◎헌종13, 정미년(1847)에  연세 팔순이 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고, 병조참판에 배수되었으나 노년이라 사직소를 올렸는데 후한 비답을 내리시고 정경(正卿)에 뽑으셨다. 이어 사직소를 통하여, 언로(言路)를 열어 놓고 당시 정치 상황을 극론하였다. 그 대략을 보면 “주현(州縣)의 거리에는 뇌물이 길에 널렸는데도 민가는 매우 가난하다는 탄식이 있고, 과거 시험장에는 청탁이 성행하는데도 초야에는 재주를 품은 선비가 많아 한스럽습니다. 전결(田結)은 재해에 감해 주어도 아래에는 은택이 미치지 못합니다. 조적(糶糴)은 거두고 나누는 것이 일정한 법도가 없고, 명분(名分)은 땅을 쓸 듯 사라져서 등위(等威)는 엄격하지 않습니다. 양역(良役)이 균등하지 않아서 빈천한 사람만 고통을 받습니다. 이밖에 흠이 될 만한 정사와 숨겨진 병폐는 일일이 거론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말을 다하고 논의를 다하는 이가 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으니, 어찌 전하께서 말을 구하는 정성이 미진해서 그렇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탕(湯) 임금은 성인(聖人)이지만 ‘허물을 고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改過不吝〉’ 라고 하였고, 선왕(宣王)은 주(周)나라를 중흥시킨 군주지만 ”제왕의 직분에 실수가 있다.〈袞職有闕〉‘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사이에 또한 어찌 말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마는 조정에서는 직언(直言)을 하는 기풍이 들리지 않으니, 백성들의 마음이 어떻게 위로 이를 것이며, 사방으로 백성들의 소리를 듣는 것이 어떻게 가려지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마지막에 재용을 절약하고 미리 대비하는 중요함을 반복해서 솔직하게 아뢰니 말의 뜻이 정확하였다. 임금께서 유지를 내리기를 ”이 사람은 정조(正祖) 때의 시종신으로 이렇게 진술하여 권면하니 매우 감탄스럽다.“ 라고 하시고, 그날로 특별히 ○자헌대부에 승진시키고, 단망(單望)으로 ○지중추부사에 임명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도록 하였다. 공께서 사직을 아뢰었으나 임금께서 허락하지 않고 본도(本道)에 유시(諭示)를 내려 틈을 봐서 올라오게 하였다. 공께서 애써 나아가 사은숙배 하고 3일 만에 도성을 나오니, 진신대부(搢神大夫)들이 시(詩)와 서(序)를 지어 전별하였다.

◎헌종15, 기유년(1849) 1월 16일에 ○형조판서에 배수되었다. 이듬해

◎철종1, 경술년(1850) 1월에 병을 얻어 이달 16일 돌아가시니 이날은 곧 공의 생일날이다. 사람들이 ‘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리 정한 것이 있었다.“ 라고 하였다. 향년이 83세이며, 부음이 임금에게 들리자 매우 애통해 하여 조회를 멈추고 상구(喪具)를 내리셨고, 조재(弔祭)를 격식과 같이 하였다.

금학산(金鶴山) 축좌(丑坐)의 둔덕에 장례 지냈으며, 사림(士林)에서 모인 자가 7백여 명이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도에 가까워 돈후(敦厚)하고 진실하였다. 말은 어눌한듯하였으나 지조를 지킴이 매우 확고하였고, 몸은 느린듯하였으나 지기(志氣)는 남보다 뛰어났다. 처신이 엄숙하여 항상 삼가고 두려워하는 뜻을 마음에 가졌고, 남을 대할 때는 온화하게 하여 모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 덕부(德符)가 외부에 들어난 것은 순수하고 편안하여 남들이 바라보고 경애(敬愛)하는 마음을 절로 일으켰다. 날마다 볼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양친을 섬기며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맛난 음식은 빠트림이 없었다. 녹봉이 있어도 부모님 봉양에 미치지 못해 지극히 애통해 하였고, 부모님에 관한 애기가 나오면 문득 눈물을 흘렸다. 다행히 태정부인께서 연세가 높으신 데도 당(堂)에 계셨는데, 공도 이미 쇠락하였으나 음식을 올리는 것은 반드시 몸소 직접 살폈고, 자제(子弟)들에게 대신하게 하지 않았다. 부엌에 불을 지필 때는 손수 땔나무를 가져왔다. 두 아우가 어려서 아버지 잃은 것을 생각하여 보살피고 가르쳐 모두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났다. 막내아우가 우연히 말에서 떨어져 토사곽란을 앓았는데, 공이 내상(內傷)을 염려하여 토한 것을 가져다 맛을 보고 이를 증험하였다. 둘째아우의 성품이 엄하여 자제들을 꾸짖으면 자제들에게 뜰아래 서서 겸손하게 사죄하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마음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두 아우가 반드시 먼저 그것을 안다. 너희들을 돌아보니 그렇지 않구나.” 라고 하였으니, 동기간의 정이 부자(父子)보다 간절했음을 알 수 있다. 돈독한 행실이 이와 같았으므로 영월(寧越)에 있을 때 백성들이 말하기를 “우리 수령의 백성 사랑은 관동에서 제일이다. 우리 수령의 우애(友愛)는 영남에 짝 함이 없다.” 라고 하였다. 종족(宗族)에 처해서는 침소(親疎)의 간격이 없었고 무릇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상사와 질병이 있으면 곡진하게 두루 구휼하였다.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에도 종족과 화목하고 어려운 이를 구휼하라는 뜻으로 미미하게 말을 이어가며 자손들을 경계하였다.

방친(傍親)의 기일에는 제물로 제사를 도왔고, 별도로 농장을 두어 제사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도모하였다. 평상시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세수를 마친 뒤에는 상을 대하고 조용히 앉아 책을 펼쳤다. 가끔 조금 나른해 지면 술을 가져오게 하여 마시고 얼큰히 취하는 것을 법도로 삼았다. 밤마다 《중용》·《대학》·정주서(程朱書)와 가끔은 선공(宣公)의 주의(奏議)와 동파(東坡)의 소차(疏箚를 암송하며, 노년이 되어서도 그렇게 하였다. 중문(中門)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상의를 갖추었고, 자부(子婦)들이 배알하여도 항상 엄숙하고 장중한 위의(威儀)를 갖추었다. 자제(子弟)를 보아도 또한 게으르고 거만하지 않게 하였고, 잘못이 있으면 모퉁이에 불러 순순히 타일러 스스로 뉘우치게 하였다.

무릇 일을 처리할 때에는 계획을 미리 세워 허둥대는 근심이 없었고, 분수가 매우 분명하여 번거로운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부(二府)에 부임해서는 장부의 회계는 묵묵히 마음속으로 셈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니, 관리들이 속일 수 없었다. 또 성품이 과묵하여 일체의 시비(是非) 은원(恩怨)과는 관계되지 않았다. 비록 사론(士論)이 분산되는 때에도 자신의 견해를 지키고 평정하여 일찍이 분노하여 중도(中道)에 지나친 말을 하지 않고 분주한 밖에 초연하니,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고 완전한 사람이라 일컬었다.

늘그막에 금성산 아래에 운곡서사(雲谷書舍)를 짓고 강학하는 장소로 삼고 명예를 추구하려고 꾸미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 풍진 세상에 고생하며 백발이 되어도 이룬 것 없고 일찍이 내면을 향한 공부를 하지 못해 한스럽다.” 라고 하였다. 일찍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정(定), 자를 특별히 써서 집에 걸어두고 그것에 대해 설(說)을 짓기를 “사람이 말과 행동은 모두 하나의 마음에서 말미암으니 마음이 곧 활물(活物)이다. 진실로 마음을 제어하고 배양하며 이기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더욱더 얽히어 어지러워짐을 보게 될 것이다. 경전에 ’그침을 안 뒤에 안정됨이 있다.” 라고 하였으니, 그 아래 8조목은 격물(格物), 치지(致知)로 우선하였다. 진실로 사물에 이르러 천하의 의리(義理)가 다하고, 그침을 알아서 내 마음의 권도(權度)가 차이나지 않는다면, 마음이 그 정(定)을 얻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군자는 궁리(窮理)를 귀하게 여기면서 반드시 거경(居敬)을 대비하여 말을 하니 경(敬)은 곧 위아래를 꿰뚫는 도(道)이다. 경이 아니면 나태하고 방자하며 어리석고 혼란하여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할 수 없으므로, 옛날의 성현에게서 경(敬) 자를 찾아내어 부지하고 수립하면 신명(神明)이 몸에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오래도록 함양하면 더러운 찌꺼기가 맑아지고 의리(義理)가 드러나 마음이 그 정(定)하게 된다.“ 라고 하였다. 

일찍이 효릉(孝陵)에 재직하면서《심경(心經)》을 읽고 시를 짓기를

“탕왕과 문왕은 지율(紙栗)하였고 순임금과 湯文祗栗舜堯欽

요임금께선 공경하였으니,

천성이 서로 전한 것은 다만 한결같은 마음이었네. 千聖相傳只一心

선악은 인도가 갈라짐에서 시작되었고, 善惡始終人道判

머리는 먼저 조존(操存)을 찾아 향하였네. 頭顱先向操存尋

성과기는 염옹(염翁)의설에서 그림으로 밝혔고, 誠幾圖闡濂翁說

공경과 방종은 범씨(范氏)의 잠명에 잘 나누어졌네, 敬肆工分范氏箴

후학들 지금도 지결을 계승하여, 後學至今承旨訣

서산(西山) 선생 책 가운데 임하였네." 西山夫子卷中臨

라고 하였다. 또 《자경서(自警序)》에서 공자가 한 말의 ‘사오십이 되어도 알려짐이 없다면 이 또한 두려울 게 없다.” 라는 것을 인용하여 ’앞날의 허물을 생각하고 훗날의 허물을 고쳐 조금씩 단계를 밟아 가며 날마다 성실히 할 것을 도모하였다. 또 두 아들을 보내 편지로 질문하고, 입재(立齋) 정(鄭)공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대개 공께서 평생에 수용한 것은 유독 자품이 남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이미 유가의 규모에 대해 묵묵히 알고 마음으로 기뻐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경전을 읽고 장구(章句)의 말단에만 일삼지 않고 반복 침잠(沈潛)하여 의리를 추구하여 자기에게 체험할 것을 생각하였다. 실제의 공부를 이루었으므로 비록 일찍이 스스로 드러내지 않아도 그 지조와 행실은 움직이면 법도에 맞았고, 벼슬살이 에서는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겼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겨 거의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었다.

공께서 과거에 오른 처음 밝은 시대를 만나 정조(正祖)의 높고 밝은 학문으로 밝게 알아보고 일찍이 규장각 강제(講製)에 선발하여 높게 칭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詩)·부(賦)·병려(騈儷)·책문(策文)·서(序)·기(記)·명(銘)·송(頌) 또한 어필(御筆)로 구절마다 비평(批評)하여 앞뒤로 상을 내린 것이 매우 많았고 총애가 더욱 극진하였다. 가령 공의 글이 공문의 자리에 부족하고 공의 재주가 다스리는 이치를 알기에 부족했더라면 어찌 이런 총애를 입을 수 있었겠는가,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정조에 대해서는 70제자가 공자를 모신 것처럼 실로 임금과 신하 사이이면서 스승과 제자 사이이니, 의리상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늘 정조의 기일이 되면 종신토록 3일 간 소식(素食)을 하였고, 자손들에게 명하기를 ‘규장각 초계문신’이라 명정(銘旌)에 새기게 하였으니 느낌이 남다른 것이었다.

공은 세리(勢利)와 영달에는 더욱 담박하였다. 젊은 날 조정의 동료들이 요직(要職)에 많이 있었으나 서로 서신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또 세상의 뒤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중년에 불우하여 공정한 언론이 실행되지 못하였으나 공은 근심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남의 보잘 것 없는 신하로 여러 번 융숭한 은혜를 입어 구구한 보답을 하려지만 말로만 임금을 섬기는데 불과하다고 하였다. 무릇 관직을 사임하고 교지에 응할 때에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 시휘(時諱)를 피하지 않고, 한결같이 충성스런 정성으로 임금을 깨닫게 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동안의 상소가 모두 온화한 비답을 받았는데, 정직하다는 칭찬이 있기도 하였고 덕망 높은 신하로 중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마침내 특별한 은혜를 입어 지위가 상경(上卿)에 올랐으나 이 어찌 요행으로 얻은 것이겠는가. 그러나 공의 규모와 정적(政績)이 시행된 것은 오직 한두 가지 백성과 조정의 임무에 있었을 뿐이지만 한결같이 임금과 백성의 뜻에 부합되는데, 부질없이 강호(江湖)의 근심을 붙어져 세상에 포부를 다 펼치지 못했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유집(遺集)이 집에 보관되어 있고 그 가운데 《중용강의(中庸講義)》 와 주서(朱書)에 대한〈고식(故寔)〉 7,8권은 모두 규장각에서 응대한 것이다.

정부인 진성이씨는 퇴도 선생(退陶先生)의 후손 사인(士人) 이귀락(李龜洛)의 따님으로, 부인의 덕행이 있었다. 공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집안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던 것은 부인이 어질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계미년(1763)에 태어나 기사년(1809)에 돌아가시었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노규(魯奎)이고 다음은 노벽(魯璧)이며, 노익(魯翼)은 출계하였고, 노면(魯勉)은 참봉(參奉)이다. 딸은 김명유(金明裕)에게 출가했다. 다음 아들은 노정(魯貞)이다. 노규의 아들은 인재(寅在)이고, 두 딸은 이만구(李晩耈)와 이이호(李以濩)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노벽의 세 아들은 경재(絅在)·생원인 유재(維在)·윤재(綸在)이고, 두 딸은 이이우(李以佑)와 정규상(鄭珪相)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노익의 두 아들은 정재(正在)와 심재(心在)이다. 노면의 아들은 대재(大在)이고, 두 딸은 김태림(金泰林)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김명유의 두 아들은 수형(壽衡)과 수화(壽華)이고, 두 딸은 김신영(金信永)과 강좌희(姜佐熙)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새재[조령(鳥嶺)] 남쪽


大嶺之南 고관대작 이어진 고가에

蟬奕古家 공께서 남다르게 태어나니

公生以異 어머니 국화를 기르셨네.

妣鞠黃花 넓은 이마 빼어난 골격에

廣顙秀骨 옥의 광채 깨끗한 눈동자

符彩凝瞳 어려서 밝고 빼어낫고

幼而朗駿 말을 하면 맑고 고왔네.

吐辭渢渢 십이 세에 스승에게 나아가니

刁齡就傅 남와 정 공의 문하였고

南窩之門 아름다운 옥으로 다듬어 져

嘉玉受琢 그 문장 옥처럼 빛났네.

빈璘其文 효도하고 우애하여

惟孝惟友 꽃피고 열매 맺으니

而華而實 천성에 근본하고

本平天植 경술을 더하였네.

加之經術 지난 정조임금 때에

粤在正廟 봉황이 무리지어 날았는데

威鳳群翔 공이 이때에 관리되어

公時釋褐 여러 번 임금의 은총을 입었네.

屢荷袞揚 문장은 넓고 고상하고

文辭博雅 아름다운 공의 대책은

嘉公對策 결백 정직하여 숭상할 만하니

白直可尙 마음의 자취 공정하였네.

鑑公心跡 규장각 강제에 선발되어

奎選講製 화려한 명성 날로 드러났으나

華聞日闡 교산에 눈물 뿌리고

喬山雪涕 중년에 고난 겪었네.

中而塗蹇 백발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皓首邱園 마음 아파하지 않았고

而不慽慽 경전에 마음 쏟으며

頤志墳典 시 읊조리고 자적하였네.

諷詠自適 임금 그리는 일편단심

有戀如丹 위로 대궐에 맺혔고

上結觚稜 소장에 드러내어

發爲章奏 우러러 성명에 답하였네.

仰答聖明 현위로 임금에게 나아가

弦韋上躬 시폐(時弊)를 바로잡았고

藥石時瘼 정직하게 움츠리지 않으니

正直不朒 지극한 정성 밝게 드러났네.

梱愊昭灼 왕께서 이에 가상히 여겨

王庸嘉 문득 조서를 내리시니

覽輒華綍 덕스런 글로 총애하여

寵以德章 상경의 반열에 이르렀네.

于上卿列 역마로 부르심을 내리고

爰降馹召 영각에 초상을 그려

肖像靈閣 모든 사람 볼 때 마다

道人隨觀 풍채 밝게 빛나네.

風采灼爍 지난날 부에 나아갔지만

曩昔府紱 굽힌 것은 영광이 아니었고

伊屈非榮 높은 관직으로 충심 다하니

金緋衷甸 실로 장려하고 표창하였네.

寔由褒旌 규장각 초계문신이라

奎章抄啓 명정에 써서 찬란하니

銘旌有皇 이는 공의 유명으로

是公遺命 아득히 서광이 드러나네.

緬揚寵光 울창한 저 금학산은 

蔚彼金鶴 흙의 참된 기운이 서리었고

土眞氣蔥 오직 공이 돌아가 창성하리니

惟公歸昌 영령이여, 흡족해 하소서

靈兮瀜瀜 비석을 세우니

麗牲之石 묘소가 빛이 나네

光燭玄隧 나의 명은 아첨이 아니니

我銘匪臾 예날 훌륭한 사관에 짝이 되리니

配古良史


철종14년 계해(1863)에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공손하고 신중한 것을 희(僖)라 하고, 너그럽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생을 잘 마치는 것을 정(靖)이라 한다.”』 는 희정공(僖靖公) 이란 시호(諡號) 가 내렸다.

숭정대부 행 의정부 좌참찬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풍산 홍우순은 삼가 지음.(崇政大夫 行 議政府 左參贊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豊山 洪祐順 謹撰)

철종 4년 계축(1853)년 12월(哲宗 四年 癸丑 十二月)


〈參考文獻〉 - 《國譯 雲谷先生文集 年譜, 文集3, 洪祐順 撰 神道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