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묘(墳墓) 및 비석(碑石)
- 등록일
- 2019-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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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트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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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의성군 금성면 수정사길19 생태공원
[詩題] 숙 봉산 동촌(宿鳳山東村)
空山雪塞有微徑 눈 쌓인 빈산에 한 줄기 오솔길 뻗어 있어
孤村煙暝響疎杵 외진 마을에 저문 연기 오르는데 방아 찧는 소리 드물더라.
薥楷編縛代柴荊 수숫대 엮어서 사립대신 세운 집
倚壁無綜有機杼 벽 아래 스산해 빈 베틀 놓였네.
七十老嫗膝過肩 일흔 넘은 늙은 할머니 않은 무릎 어께를 넘는데
見客咿嚘泣且訴 나보고 한숨 지며 눈물 섞어 하소연 하네.
一子年前屬右營 지난해 외동아들 군사로 뽑혀갔소
身充火手渡遼去 총 메고 요동으로 건너갔는데
全師覆沒無得脫 거기서 우리 군사 모조리 죽었다니
戰骨沙場收底所 어느 싸움터에 백골로 묻혔는지
老身單獨與死伍 이 늙은 게 혼자라면 벌써 죽었으련만
捕持幼孫無置處 어린 손자 놈을 맡겨둘 데 없구려.
前冬戊兵數百騎 지난겨울 말 탄 병정 수백이 달려와
劫掠村閭甚於虜 겁탈해 가는 것이 적병보다 더했수다.
缾缸一空菹醬竭 간장독 장 단지 다 긁어갔으니
遺資敢望留筐筥 양식인들 한 알이나 남겨 뒀겠소.
數口充糊雜橡菽 도토리 산나물로 겨우 연명해가니
四支嬴困難掉擧 이제는 사지를 가눌 맥도 없다오.
頑命雖存不如死 목숨이 모질어 죽지 못해 살지만 죽느니만 못하지
死後更有何思慮 차라리 죽었으면 근심 걱정 없을 걸,
我聞此言心骨悲 할머니의 하소연 들으니 뼈가 저리도록 가슴 아프네.
爾語且休聆我語 말씀을 잠깐 멈추고 내 이야기도 들어보소,
我家亦有荷殳人 창을 메고 싸움터에 간사람 우리 집에도 있소.
萬死生還命如縷 실낱같은 목숨을 겨우 살려 돌아왔소.
儂今來往爲此耳 내 지금 이렇게 나도는 것도 그 모진 싸움 때문이라오,
聽渠不覺零如雨 할머니의 하소연에 눈물이 비 오듯 하네,
鳴呼哀哉可奈何 오오 슬프도다! 이 일을 어이하는고.
普天之下奚獨汝 만천하에 이런 사정 어찌 한 집뿐이랴.
安得銷兵息戰鬪 언제면 저주로운 싸움 없어져
普天之下無寡女 넓고 넓은 하늘 아래 과부들 안 생기게 할 소냐?
- 해설 : 경정(敬亭)공이 49세 되던 해(1618년) 명이 후금과의 싸움으로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었다. 조정에서는 강홍립을 오도도원수로 삼아 1만 3천명의 군사를 주어 출정하게 하였다. 경정(敬亭) 공의 아우 자암(紫巖) 이민환(李民寏)(1573~1649) 은 강홍립(姜弘立)막하의 문종사관(文從事官)으로 출정하게 되는데, 군대는 후금의 포로가 되어 17개월 만에 풀려난다. 하지만 이민환(李民寏)은 다시 무고(誣告)를 받아 평안도 지방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경정은 이에 아우를 보기위해 가는 길이 봉산(鳳山)땅을 거치게 되었던 것이다.
- [숙봉산동촌(宿鳳山東村)] 은 그 때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민생들의 참상을 그린 시이다. 황해도 봉산고을의 동촌이란 마을에 경정(敬亭)이 들러서 할머니와 나눈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아우가 후금의 포로가 되어 풀려나지만 다시 무고를 받아 평안도 지방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아우를 보기 위해 마을에 들렸는데 그때가 1620년 겨울이었다.
※북한에서 1986년에 펴낸「조선문학개관」에서「宿鳳山東村」이란 題目의 詩는 현실생활의 부정적인 면을 폭로 비판한 대표적 작품이라고 그들은 분석하였다.
〈參考文獻〉-《경정집 卷之11, 364쪽》·《國譯 敬亭詩選 宿鳳山東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