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建物), 고택(古宅), 서원(書院)
- 등록일
- 2019-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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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운(山雲)마을의 유래
의성읍에서 동남으로 약12킬로 지점에 금성산(金城山), 비봉산(飛鳳山)이란 두 거봉이 솟아 그 사이에 맑은 물이 흘러 내를 이루고 넓은 평지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300여 호의 대취락(大聚落)이 기다랗게 자리한다. 이곳은 영천이씨 시조 고려 영동정(領同正) 휘 이 박(李 磗)공의 14세손인 감사공파의 파조(派祖)이신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공의 후손들이 단일씨족의 집성촌을 일구어 450여 년이란 긴 세월을 넘기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산운(山雲)이란 곳이다.
구전(口傳)하는 바에 의하면 학동공께서 소시(少時)에 처가 곳(의성지방)에 가다가 산운마을 서편입구(솔끝)근처에서 잠시 쉬던 중 상좌와 시동(侍童)이 길을 가면서 “이곳이 명지(名地)인데!......벌써 주인이 와 있는 모양 같아!” 라고 하면서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다. 공은 뒤따라가면서 상좌에게 그 사연을 물었더니 “이곳은 명지라 후일에 크게 발복할 곳이니 이곳에 정주(定住)하시오” 라고 했다 한다.
당시 군위 땅에서 살고 있던 공은 그 말을 좇아 명종(明宗),무오년(1558)에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소시랑(蘇侍郞 :쇠랑골-지금의 산운마을 앞동산 넘어 비봉산록) 리에 거처를 옮겼다. 그 후 공은 명종임술(1562) 문과에 오르고 아들 4형제(民宖, 民宬, 民寏, 民愷)까지 두었다. 그 후 다시 둘째 민성공이 선조(宣祖),정유(1597) 문과에 셋째 민환공은 선조, 경자(1600) 문과에 올랐다. 학동공은 상좌의 말대로 경자년(1600)에 지금의 산운마을로 거처를 옮겼으니 그 후 홍유 석학이 잇따라 나와 산운의 명성을 인근에 떨쳤다.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의 명지
이 산운마을의 지형을 옥녀산발 형(玉女散髮形)이라 했다. 400여년에 걸쳐 세거하면서 보기 드문 대 취락을 형성하고 이 마을 사람들은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사(歌辭)등으로 이 명지(名地)를 노래하고 있다.
북으로 우뚝 솟아 옥녀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듯이 유장(悠長)하게 뻗친 금성산(金城山), 비봉산(飛鳳山)의 흐름을 『옥녀가 머리를 풀고 있는 모습」에 비유한다. 대평천(大平川) 넘어 팔면봉(八面峰)은 흡사 벽에 걸린 거울의 형상이니 이것은 어김없는 「괘경(掛鏡)」 이라 하겠다. 앞동산은 뽑아 놓은 「비녀」를 둔 것 같고 마을 앞 들판은 「빗 집』 이다. 옛날 농경시대 더구나 조선조 중기이후 영남지방 반촌(班村)에는 많은 규방가사가 지어졌고 선비들의 사랑방가사도 많이 있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규방아녀자들의 유일한 읽을 꺼리었으니 산운에는 옛날부터 많은 가사들이 전해 오고 있었다.
양산(讓山) 이태능(李泰能)공(1887~1961)의 옥녀사(玉女辭)는 『내 고향은 옥경(玉鏡)이오, 내명호는 옥녀로서, 금성산 상상봉에 거처한지 오랜 지고, 천마봉 옛 이름은 옥녀로 고쳐짓고, 이 땅에 처음 올 때 황학(黃鶴)타고 내렸기로, 이산이름 금학(金鶴)이오, 앞산에 퉁소 불 때, 봉황이 춤추기로 앞산이름 비봉이오, 단장할 때 보는 거울 건너 봉에 걸렸기로 건너 봉은 괘경(掛鏡)이오, ....중략....이아래 큰 동리는, 만산채운(滿山彩雲) 얽혔으니, 상서(祥瑞)빛이 찬란키로 동네명칭 산운(山雲)이라』 하여 이곳 옥녀산발형의 상서로운 명지를 노래하였다.
또한 운보(雲甫) 이우(李雨)공(1885~1933)은 한별곡(恨別曲)에서 「금성비봉 높은 산에 록의홍상(綠衣紅裳) 때를 지어, 두견화(杜鵑花) 머리 꽃고 송기 꺾어 가로물며 백석담(白石潭)에 손발 씻고 녹음하(綠陰下)에 빰돌치니, 불여귀(不如歸) 우는소리 서산락조(西山落照) 잠깐이라,....중략....학록정사 높은 집을, 문(門) 부노(父老)께 허가 얻어 개장 밥 시켜놓고 외수박 참 먹으며, 환선(紈扇)놓고 척사(擲柶)치니, 손뼉소리 같이 로다.....』 고 읊어 산운마을은 이 고장 사람들에게는 꿈의 동산이었다. 금학비봉의 협곡에서 흘러내리는 마을 앞(뒤) 거렁은 이 마을의 수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물이 맑기로 유명하여 수량암자(修量庵子)의 명칭이 수정사(水淨寺)로 바뀌기도 했다. 팔면봉(八面峰) 앞자락에는 보현산(普賢山)줄기에서 발원하는 큰 내가 빙계(氷溪)상류에서 금천(錦川)하류에서는 옥계(玉溪), 산운(山雲)마을에 와서는 다시 대평천(大平川)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탑리(塔里)앞에 가서는 감천(鑑川)이란 이름으로 흘러 없어서는 안 될 이곳의 농사관계수원(農事灌漑水源)이 되고 있다.
〈參考文獻〉-《永川李氏의 淵源과 그 世系》·《李木(抄錄) 우리고장 山雲마을》